다천의 시와 서, 식물성 사유가 꿈꾸는 초원
다천(茶泉)은 풀잎같은 사람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결따라 눕고 바람 그치면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목청 높여 정의(正義)를 농락하지오 않거니와 능멸당한 정·불의(正·不義)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는 온유(溫柔)함으로 소리나지 않게 살기를 꿈꾼다. 풀잎처럼 살아지기를 바라 시를 쓴다. 그의 시는 온유함의 상징으로 펼쳐진 초원(草原)이다.
그의 서(書)는 도저(到底)함이 고요하게 깃들어 있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이다. 옛 사람이 일컫기를 시와 서는 서로 상응한다고 했다. 근원된 형식이 있어서 옛것으로 기틀을 삼으라 했다. 시와 서도 인간의 일이라서 인간이 태어나 죽기까지 겪는 모든 변화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담아낸다. 이같은 변화가 육신의 모진 고통을 거쳐 정신으로 화(化)하여 나타난 것이 시와 서의 형식이다. 형식이 옛것으로 기틀을 삼되, 옛것을 부질없이 모방하고 맹종하여 오늘이 백 년 뒤의 옛날이지 못하고 마는 허망과 방종으로 다만 어지러울 따름인 남의 글 흉내내기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라 겉치장일 뿐이다. 정신의 숲은 보지 못하고 겉치레의 나무에 생애를 탕진하는 것이다. 연암(燕巖)이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세월은 도도하게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한다.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다. 천추만세는 지금부터가 옛날인 것이다.”라고 한 것 같이 천추만세(千秋萬世)는 지금부터가 옛날이 된다는 것을 알때에만 가능한 그 옛것이요, 옛것으로 형식을 삼을 줄 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와 서에서 형식이란 정신의 숲인 것이다.
시는 아름다움이 마치 맑고 고요한 가을 강에 비친 산이듯 물도 산도 서로 변함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깨달음이다. 또한 서는 시로 터득된 아름다움의 샘물이 말지 않게 하며 아름다움을 향해 끝없는 길을 가게 하는 반려(伴侶)이다. 다천의 시는 온유하다. 세상과 자연, 역사와 인간을 향한 그의 천품이다. 그의 시서집(詩書集) 입목유희[入木遊戱]에 실려있는 ‘春旱有慼’은 그의 온유함의 내면을 느끼게 해 준다.
旱雲逾月憫晨多 긴 가뭄 농사꾼의 시름을 깊게 하누나
뻐꾸기도 비내리기를 울며넛 비네
사람과 자연이 서로 어긋나 버렸으니
둘 사이의 조화를 누가 이루어 낼꼬
그의 온유함 속에는 인간이 차마 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이 있고 겸애(兼愛)와 애인(愛隣)이 있다.
또한 ‘사람과 자연이 서로 어긋나버렸다’는 구절에 이르면 오늘, 여기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돌이킬 수 없이 일그러진 삶을 보게 한다.
조화로운 자연의 순환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스스로 자연과의 불화를 자초하여 불행해지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해 준다. 자연의 응징인 오랜 봄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있는 농사꾼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 것은 늦어가는 봄날을 울어예는 뻐꾸기 뿐이다. 다천의 어진 심성이 곧 뻐꾸기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그의 시와 서는 일찌기 한문을 수업한 다움 서에 입문한 정통서법에 맥이 닿아 있다. 그래서 겉모양새를 꾸미기에만 매달리는 글꼴놀이로서의 이름바 ‘상업서예’라는 잘못 태어난 그 애물단지와, 다천의 서는 근본적인 자리가 다르다. 그의 서는 자신의 학문과 심서잉 각각 한쪽의 바퀴가 되어 정립된 수레바퀴로 굴러가면서 남기는 삶의 흔적이며, 철학이 녹아서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시가 자신의 식물성 사유 체계에 의해 쌓여진 자연과 인간을 향한 따뜻함이며 부드러움이라면, 그의 서는 시를 직조해낸 정신의 궤적이다. 따라서 그의 서는 학문과 정신이 담보된 자유분방함이되, 부끄러움 많은 어진 성품에서 자라난 곧은 기질로 질주하는 유려함의 초원이다.
머뭇거리지 않고 풀잎 위로 내닫는 바람같은 서는 자신의 철학으로 달구어 낸 시를 자신의 악기인 붓으로 연주하는 음악이기 떄문에 유려한 산맥으로 뻗어가다 드넓은 평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기도 한다.
늦가을 밤비처럼 소슬하게 내비치는 전통의식이 실개천 혹은 산중계곡 물소리로 은은히 들려오는 서정의 음률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것이 다천 시서의 흥겨운 가락이자 풀잎과 바람의 미학을 넘보는 형식이다. 그는 식물성 사유로 역사를 읽는 시인이자 눈부신 외로운 옛사람의 오늘이다.
自來好語出飢腸 예로부터 좋은 시는 주린 창자에서 나왔나니
一字堪酬五十絹 한 글자에 비단 오십 필을 쳐줄만 하다.
袁宏道의 ’贈陳正夫’
정동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