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링크초대김종원전
ChaosmosStroke - 글신神들다
아트링크초대 김종원전 에는 김종원의 근작 <혼돈混沌>시리즈 <문자영성文字性靈>시리즈 <문문자자文紋字孶>시리즈 등 총 27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김종원의 작품은 주문(呪文)에 걸린, 신들린 필획(筆劃)으로 텍스트의 의미(意味)를 우리시대 미감으로 번역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여느 작가와 다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는 오늘날 사회가 이성화(理性化)된 나머지 주술적(呪術的) 주문(呪文)이 사라진, 현대의 모든 서화(書畵)적 표현에 있어서 그 주술적 주문이 가지고 있던 혼돈적(混沌的) 의미(意味)의 깊이를 되살리는 곳에서 서화는 이 시대 예술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고 본다...... 말하자면 나의 서화작업 행위는 시문(詩文)이거나 사물을 멋있게 서사(書寫)함이 아니고, 그 시문이 놓쳐버린 의미(意味)에 대한 해석이자 번역이다. 동시에 그 곳에는 나의 내면(內面)의 의식적(意識的) 무의식적(無意識的) 감동이 존재하기도 한다.“ 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혼돈混沌> <문자영성文字性靈> <문문자자文紋字孶>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문자해체와 재구성으로 필획(筆劃)해낸 자화상(自畵像)이다. 동시에 자신을 타자화(他者化)시키고 비워낸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우리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사회상(社會相)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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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書)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하나다. 조형(造形)과 내용(內用)이 둘이 아니다. 동전(銅錢)의 양면같이 문장 내용이 의미하는 이미지와 글자 조형이 일치할 때 서(書)는 이상적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빈(貧)’이라는 글자는 ‘가난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貧’이라는 문자로 형상화해 ‘빈’이라고 소리언어로 읽어낸 것이다. 이때 까지 ‘貧’은 문자일 뿐이다. 문자가 비로소 서(書)가 되는 단계는 ‘가난하다’라는 이미지가 작가마다 다른 문자조형으로 표출될 때다. 물론 이것은 점획(點劃) 결구(結構) 장법(章法)은 물론 필법(筆法)과 묵법(墨法)이 글자조형과 내용에 따라 유기적으로 다양한 양태로 조응할 때 가능해 진다. 여기에서는 점획(點劃)하나 하나가 그냥 물질이 아니다.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로 작가의 성정(性情)과 기질(氣質)을 대신한다. 무수히 많은 문자조형(文字造形)을 서적(書的)으로 규정짓는 1차적인 요소는 필획(筆劃)이다. 이 것을 뒤집어 보면 필획만으로도 서(書)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추사체(秋史體)다’ ‘왕희지체다’ 는 말도 글자라는 집의 짜임새 이전에 기둥과 서까래에 해당하는 필획의 독자성이 관건이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 서(書)에 있어 필획은 어떤 서체(書體)나 필체(筆體)의 시대성과 사회성까지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점은 서구미술에서 작가마다의 변별력이 선(線)이 아니라 면(面)을 중심으로 결정된다는 사실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획이 스트록(stroke)으로 입체(立體)라면 선은 라인(line)으로 평면(平面)이다. 필획(筆劃) 자체가 이미 독자적인 조형언어라는 이점에서 서(書)는 서구관점의 추상미술(抽象美術)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이후에도 동아시아 문화적인 정체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시대의 서(書)의 양상은 실험과 정통을 막론하고 역사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험을 문제 삼는 서(書)는 문자가 완전히 해체되어 텍스트와 이미지가 별 무관하게 나열되기 일쑤다. 문자조형을 완전히 파괴하여 ‘빈(貧)’이라는 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이미지의 파편만 필획으로 남아 있다. 이 경우 필획은 그냥 물질로서 남겨진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정통서예의 경우도 작가마다 대동소이한 문자조형 구조를 전제로 지나치게 텍스트에 무게중심이 쏠려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시적(詩的) 문학적(文學的) 이미지와는 무관한 문자를 조형적으로 나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시(詩)의 내용이 ‘슬프면’ 응당 필획언어(筆劃言語)도 ‘슬프게’ 이미지화 되고, 이런 ‘슬픈’ 이미지는 결구(結構)나 장법(章法)으로 승화되어 화면공간(畵面空間)이 경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시대 서(書)는 이래 저래 그 절반을 상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서(書)의 힘을 현실에서 온전히 발휘해 낼 수 없는 지경에 처해있다. 이미지 중심의 실험(實驗)서예는 서구추상미술의 아류로 낙인찍혀있고, 정통서예는 한자(漢字) 한글을 막론하고 기법(技法)위주의, 그것도 남의 문장 ‘쓰기’ 중심의 공모전(公募展)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정작 가장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서(書)라고 하는 예술이 그 서(書)의 작자가 존재하는 일상의 삶이나 시대와 사회를 제대로 잉태하거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점 점 더 현실사회와의 불통이 심화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글전용이 고착화 되고, 일상의 문자문명마저도 붓글씨 ‘쓰기’에서 키보드 ‘치기’ 사회 한가운데로 접어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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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書)의 현실을 감안할 때 아트링크초대 김종원전 에서 보여주는 작품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우선 <혼돈混沌Ⅱ - 사유思惟의 문자적文字的 변상變相>시리즈다. 이것은 김종원 작업의 또 다른 한 축으로서 거의 동시기에 등장하는 기존의 <혼돈混沌Ⅰ>시리즈(그림1)작업과도 다르다. 적묵(赤墨)의 무수한 획(劃) 질과 획 칠의 반복이 전자라면 문자조형을 타파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필획이 난무(亂舞)하는 혼돈(混沌)연작이 후자다. 또 <混沌 -思惟의 文字的 變相>시리즈는 필획이 난무(亂舞)하는 혼돈(混沌) 그 자체에서 공간의 새로운 질서(秩序)를 좌우대칭(左右對稱)으로 경영해내면서 더 나아가 다목(多目)의 인면(人面)이라는 새로운 형상성의 창출로 이어진다. 그 대표작인 <辰宿列張> <水火旣濟> <惚兮恍兮> <變幻自在> <彌勒現身> <視而不見> <隱而何求> <冥冥之中 獨也惺惺> <冥冥之中 獨也惺惺>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런 인면형상이 대상(對象)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내면(內面)의 표출(表出)이란 사실이다. 이러한 지점은 문자(文字)라는 대상의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되 기존 서단에서 행해지는 이미지의 나열과는 양상이 다르다. 더구나 선(線)과 획(劃), 그러니까 평면의 라인과 입체의 스트록(Stroke)의 개념조차 모호한 서구중심의 현대추상미술 잣대나 범주로도 완전히 이해하거나 묶어낼 수 가 없다. 이점에 대해 김종원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 서화(書畵)의 표현(表現)에서 서화가 서화일 수 있는 불가결한 요소이자 핵심적 표현 기법인 획(劃)에 대한 인식(認識)을 새로이 한다. 획(劃)은 서(書)와 화(畵)의 근본적 성질에 대한 설명적 문자이자, 서화(書畵)표현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기법이다.” 여기서 김종원은 서화(書畵)가 서화일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핵심적 표현기법을 획(劃)으로 인식(認識)하면서, 획이 자기 예술의 시작이자 끝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는 <문자영성文字性靈 - 呪呪祝祝>시리즈를 보자. 우선 ‘소전(小篆)’이라는 필획과 문자구조를 재해석하여 화면을 경영해내고 있음이 눈에 뛴다. 문자발전 역사에서 소전은 전서(篆書) 중에서도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 대전(大篆)을 거쳐 전서의 맨 마지막 단계에 등장하는 문자다. 전서가 기본적으로 신성(神性)문자라면 예서(隸書) 이후 해서(楷書)나 행초(行草)는 인간(人間)의 문자라는 입장에서 소전은 성격상 신(神)과 인(人)이 교차되는 지점의 문자다. 이런 소전의 관점에서<문자영성文字性靈 - 呪呪祝祝>시리즈를 보면 <혼돈混沌>시리즈와 공간이 경영되는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검은 바탕공간은 그냥 검은 색, 즉 불랙(Black)으로 보기 쉬우나 그것이 아니다. 이미 김종원이 무한대의 붓질 먹칠로 현현(顯現)해낸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우주다. 이런 공간을 수많은 필획(筆劃)과 간가결구(間架結構)가 균일(均一)하고도 좌우대칭(左右對稱)인 구조로 경영해내고 있다. 그런대 읽힐 듯 말 듯 한, 문자인 듯 문자가 아닌 듯 한 문자형상이 문제다. 읽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絶對)추상이고, 그런 가운데 다목(多目)인 인면(人面)형상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 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문자영성文字性靈 - 呪呪祝祝> 또한 작가의 자화상으로 읽혀진다. <文字性靈 - 呪呪祝祝>부적 시리즈인 <壽康萬年> <安身立命> <招福迎祥> <招福迎祥> <時和年豊>등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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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문자자文紋字孶>에 가서는 기존의 <혼돈混沌Ⅱ> <혼돈混沌Ⅰ>시리즈나 <문자영성文字性靈>시리즈와 전혀 다른 형상으로 문자가 재해석되고 있다. 이번에는 필획을 넘어 문자와 문장을 문제 삼고 있다. 그것도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문자구조하고도 종류가 다르다. ‘문문자자文紋字孶’라는 말 자체가 그러하지만 문자나 문장을 이미지로 파악하여 글자 한 자는 물론 문장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군으로 등장한다. 특히 ‘자(孶)’는 글자가 새끼를 낳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장의 흐름을 쫓아 ‘말’이어달리기가 ‘문자’이어달리로 경주된다. 텍스트를 붓으로 ‘썼다’기 보다 제도나 설계 디자인 언어로 ‘그린’ 것이 더 정확할 정도로 점획은 물론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서로 서로 공간적인 침투와 조응으로 관계하면서 결국에는 작가가 의도하지도 못한 형상의 배열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된다. 물론 텍스트로서 문장은 고전의 시문(詩文)에서 채택하였다. 이하(李賀)의 시 <소소소묘蘇小小墓> <숭의리체우崇義里滯雨> <장진주將進酒>나 <금강경金剛經>은 물론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와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沈黙)>과 같은 것이다. 이런 텍스트가 그냥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서적書的으로 변상變相되면서 새로운 ‘문자조형시(文字造形詩)’로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한용운의 <님의 침묵(沈黙)>을 텍스트로 먼저 보자.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하지만 김종원이 재해석해낸 <문자자자文紋字孶 - 한용운韓龍雲의 시詩 “님의 침묵沈黙” 그 서적書的 변상變相>은 텍스트의 해독(解讀)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기존의 작가들이 의례히 시도하는 정자나 흘림, 전예나 행초도 아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만 봐도 차라리 한글쓰기가 아니라 ‘한글문자도’라 해야 옳을 정도로 한글조형과 구조를 김종원만의 독자적인 상징체계로 해석하여 필획언어로 써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그림문자로서 상형성(象形性)이 노골적인 갑골문 종정문과 같은 신성문자(神聖文字)의 필획(筆劃)이나 구조적(構造的) 특질에 포커스를 맞추어 불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들 상형문자가 가지고 있는 주문(呪文)의 상징성(象徵性)까지 21세기 문자영상시대 시각과 미감으로 훔쳐내고 있다. 필획을 예로 들어 보자. 현침전(懸針篆)과 같은 필획(筆劃)으로 화면(畵面)전체를 텍스트의 흐름에 의거하여 한 획(劃) 한 획, 한 자(字) 한 자, 한 줄 한 줄 종횡(縱橫)으로 경영해내고 있다. 이러한 운필은 행초(行草)에서 잘 드러나듯 작가의 성정기질을 찰나적인 붓질로 낚아내는 일필휘지(一筆揮之)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이해된다. 김종원의 <문문자자文紋字孶> 시리즈는 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만해도 하루에 10시간씩 일주일이 소요되는 장인적(匠人的)인 극공(克功)이 요구된다. 이즈음에 가서는 필획을 놀리는 행위자체가 일자삼배(一字三拜)의 사경(寫經)과 같이 예술을 넘어 종교적(宗敎的)차원의 이해가 요구된다. 극공이자 통령(通靈)이다. 이와 같이 김종원의 작업은 필수적으로 문자의 신성성(神聖性)이나 령성(靈性)이 전제될 때 더 확철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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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종원은 문자와 문장을 서적 필획언어로 해석하고 연주해냄에 있어 서로 다르다면 다른 조형어법을 구사해내면서도 결국 하나로 통하는 <混沌Ⅱ> <혼돈混沌Ⅰ>시리즈나 <文字性靈>시리즈, <문문자자 文紋字孶>에서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서로 다른 3가지 종류의 형상 속에 공통으로 내재해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문자(文字)의 주술성(呪術性) 신성성(神聖性) 령성(靈性)을 오늘날의 문자영상시대에 회복해내는 일이다. 이에 대해 김종원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 이성화(理性化) 되어 주술적(呪術的) 주문(呪文)이 사라진, 현대의 모든 서화적(書畵的) 표현에 있어서 그 주술적 주문이 가지고 있던 혼돈적(混沌的) 의미(意味)의 깊이를 되살리는 곳에서 서화는 이 시대 예술(藝術)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고 본다. 나의 일련의 서화적 작업은 이성화(理性化) 되어오는 서화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서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형해화(形骸化)되어진 것에 대한 반동(反動)으로서 그 의미의 주술성 회복에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나의 서화작업 행위는 시문(詩文)이거나 사물(事物)을 멋있게 서사(書寫)함이 아니고, 그 시문이 놓쳐버린 의미에 대한 해석이자, 번역(飜譯)이다. 동시에 그 곳에는 나의 내면(內面)의 의식적(意識的) 무의식적(無意識的) 감동(感動)이 존재하기도 한다.“ 요컨대 김종원은 이성(理性)이 판치는 현대사회의 모든 서화적 표현을 주문(呪文)이 가지고 있는 혼돈적(混沌的) 의미(意味)를 깊이 되살리는 곳에서 치열하게 찾고 있다. 작가의 말 그대로 김종원의 서화미술(書畵美術)작업 행위는 시문(詩文)을 서사(書寫)함이 아니라 시문의 필사가 놓쳐버린 의미(意味)를 필획언어와 문자조형으로 다시 해석하고 번역해내는 일이다. 재차 묻고 있지만 김종원은 왜 현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서예문화(書藝文化)에 반동적인 이런 작업에 골몰할까. 앞서 본대로 키보드 ‘치기’에 의한 문자영상시대 문자문화나 문명이란 칼 ‘새김’시대의 주술성 신성성 령성은 고사하고 붓글씨 ‘쓰기’ 시대의 인성(人性)과도 거리가 멀다. 김종원은 이를 ‘이성화’로 규정했지만 ‘ 키보드 치기가 급속도로 진행되면 될 수록 우리 인간(人間)의 성정기질은 기계(器械)가 되어 갈 수 밖에 없는 사회 환경이 오늘 날인 것이다. 그나마 현실의 서(書)문화를 이끌고 있는 ‘공모전(公募展)’마저도 정작 ‘서예’라고 하고는 있지만 양의 동서(東西)를 넘나들거나 문자영상의 서(書)가 이 판치는 21세기적 관점의 예술과도 거리가 멀다. 작가가 누차 밝힌 바대로이지만 그의 반동적(反動的) 필획의 진원지는 바로 서(書)의 주술성 회복이다. 주술성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과 자연, 나와 너라는 물아(物我)가 하나 되는 지점이다. 신(神)들린 붓질이란 예컨대 추사 김정희가 <불이선란도>에서 말하듯 성중천(性中天)‘의 세계가 ’불이선(不二禪)‘과 경계 없이 넘나드는 세계이고, 그 자체가 또 ‘자신불(自身佛)’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천진(天眞)의 세계라 할 이러한 경지란 기본적으로 전문작가만의 화두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인성(人性)이나 디지털치매가 문제가 되고 일반 청소년이나 노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영역이다. 더욱이 주술성회복은 서예(書藝)를 넘어 동아시아 서화(書畵)와 21세기 동서미술(東西美術)의 토대이자 궁극으로서 서(書)의 역할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 동아시아 서화미술을 관통하는 언어로서 김종원의 서화형질(書畵形質)에 대한 작가의 발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 書와 畵는 그 문자의 발생초기에 이미 呪文의 형상을 書寫하거나 刻入한다는 동질적 功效性을 지니고 있었고, 그 표현적 형상에는 구상적 추상적 요소가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형상들은 呪語의 형상적 표현으로서 呪文이거나 呪祝의 紋樣이다. 인간의 염원을 신에게 빌어 이루려는 행위의 언어가 부호적으로 아니면 기호적으로 문양화 되거나 문자로 발전하여 왔다. 여기에서 書畵는 발생적으로 동질이라 하겠다. 따라서 書寫 도구를 사용하여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에는 인간의 생각이 담기고, 동시에 그 생각은 意味를 담아 神에게 바라는 문자로 발전한다. 문자로 발전하기 전 단계에서 言語로 그 呪祝이 이루어지고 言語의 靈을 담은 도구로서 文字는 그 역할을 한다.“ 여기서 김종원의 서화미술언어내지는 조형언어로서 필획(筆劃)은 근본 각입(刻入)과 서사(書寫),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의 아름다움은 물론 신성(神性)과 령성(靈性)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서(書)에서 필획은 그 모태가 되며, 필획을 유전인자로 한 서화(書畵)는 한 몸으로 모든 예술과 정신문화의 중추가 된다. 필획 하나 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자 완성된 유기체이자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필획(筆劃)으로 김종원은 인간이 이 땅에 처음 등장하면서 자연과 우주와 관계하면서 처음 기원(祈願)으로 사유(思惟)하고 표출했던, 날 것으로 곰삭은 무문자(無文字)시대의 원초적(原初的)이고도 생생한 자의식(自意識)의 표출로서 주축(呪祝)을 형상화해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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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마다의 성절기질을 반영해낸 그 필획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 일까, 또 그 필획은 무엇을 담아낼까. 이에 대해 김종원은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나의 書畵行爲는 이곳에서 출발한다. 문자(文字)의 形에 담겨있는 意와 音이 지닌 원초적 意味 에 대한 심미적 탐구로서 書畵行爲이다. 일차적으로 문자가 그 표현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문자의 형상에 담긴 의미(意味)는 인간의 언어적(言語的) 의미를 십분 전달하지 못하였고, 또한 언어는 인간의 최초의 생각이 지닌 의미(意味)를 십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나는 直視한다. 文字의 표면적 약속된 의미의 불충분한 전달과, 言語의 생각에서 발생된 의미에 대한 불충분한 전달에서, 이미 사라진 최초의 念願으로서의 意味 즉 呪祝의 내용에 대한 書畵的 탐구 표현이 나의 서화 심미관이다.” 요컨대 언어(言語)나 문자(文字)라는 놈이 가진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형상만으로는 약속된 의미를 충분하게 상대방에게 전달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누차 밝힌 대로 문자조형의 기본이 필획이다. 이것은 유전인자(遺傳因子)가 그러하듯 사람마다 말의 소리성질이 다르고, 글자의 획 질이나 꼴이 다른 것과 같다. 하지만 이것이 김종원 작가의 문제의식과 같이 근본 말과 글자이전의 ‘인간의 최초의 생각이 지닌 의미를’ 다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김종원의 서화, 아니 서화미술의 심미관은 ‘이미 사라진 최초의 念願으로서의 意味 즉 呪祝의 내용에 대한 書畵的 탐구 표현’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종원의 다음 언설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문자의 형상을 서사함이 아니요, 그 문자들이 지닌 의미의 주술성에 대한 서사적 행위로서 표현이 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 곳에는 悲願, 怨望이 내재하면서 五慾七情의 주술적 解寃을 기대하는 행위로서의 呪文을 표현하는 고대적 원초적 주술행위에 나의 서화작업 행위는 그 예술적 근저로 삼는다.” 이 말은 김종원 작가 자신이 관찰자가 아니라 시공(時空)이 하나로 통하는 21세기 문자영상시대 주축(呪祝)의 주재자임을 자임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석기시대나 IT시대나 생사(生死)문제나 우주자연(宇宙自然)을 대면하면서 절대자(絶對者)를 인식하고 또 교통하는 방식,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욕망을 소비 발산하는 인간의 태도나 본선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 작가다. 마치 3만5천년전 알타미라동굴벽화를 그리던 주인공이나 8천 여 년 전부터 천전리 반구대 양전동에서 암각화를 각입하던 샤만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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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김종원의 서적(書的) 필묵언어(筆墨言語)로 구사된 <混沌Ⅱ> <혼돈混沌Ⅰ>시리즈나 <문자성령 文字性靈>시리즈, <문문자자文紋字孶>시리즈는 일차적으로 ‘비원(悲願) 원망(怨望)이 내재하면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주술적 해원(解寃)을 기대하는 행위로서의 주문(呪文)’의 체험적 실존적 고백록이자 김종원 작가의 작화상이다. 또 모든 예술은 작가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를 직 간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 에서 내보이는 작품들은 작가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의 불화를 혼돈과 질서의 붓질로 증언해내고 치유하고자하는 열망의 표출과 다름 아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예술이 사회와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사랑과 치유를 말한다. 이럴 때 작가는 선사시대 하늘과 땅을 교통하면서 공동체의 안녕과 구원을 해결해내는 샤만과 같은 존재로서 작가 그 이상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거장과 걸작의 조건은 아마 여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혼돈混沌> <문자영성文字性靈> <문문자자文紋字孶>는 서적 필획언어가 내장된 주문(呪文)이자 엑스타시 상태의 성령이나 무의식(無意識)세계를 필획(筆劃)해낸 증좌로 이 보다 더한 자화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또 자신의 구원이전에 세상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밖으로 열어놓고 자신을 객관화(客觀化)시킨다는 점에서 타자화(他者化)된 작가의 자화상(自畵像)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사는 공동체만 봐도 ‘세월호’사건이나 ‘메르스’사태로 경험하고 있듯이 부조리한 사회와 현대문명의 위기를 나를 비우고 버림으로서 치유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작가의 강렬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점에서 김종원의 작업은 그냥 서화(書畵)가 아니라 자신을 태워 남을 밝히는 이타적(利他的) 서(書)다. 사실 20세기 근 현대 서(書)는 식민지 서구화 100년 동안 화(畵)와 분리되고 서구미술(西歐美術)밖에 내 쳐졌고, 그 결과 ‘공모전(公募展)’과 ‘자기수양(自己修養)’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와 이기적인 붓질에 골몰해왔다. 적어도 지금 실천되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의 서작(書作)을 통해 판단해볼 때 <조선미술전람회> <국전>에서부터 지금현재 300 ~400개를 헤아리는 공모전 100년의 역사가 말해주듯 상(賞)에 목을 맨 이기적(利己的) 서(書)만 횡횡할 뿐이다. 더구나 서(書)라는 장르자체가 유희(遊戱)나 자기수양적(自己修養的)인 측면이 강한 예술장르이다 보니 사회적 발언이 근본 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김종원 서작(書作)의 가치는 주문(呪文)에 걸린, 신(神)들린 필획(筆劃)언어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서화와 미술, 동과 서, 역사와 현대와 같은 프레임과 굴레를 깨고 우리시대에 현현시켜내면서 결국에는 우리미술의 미래와 본자리를 모두 건드리는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