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종원 그림의 원형原形은 서書이전의 언어에서 찾아진다. 애초 서書에서 시작하였으나 서書를 넘어 그 이전을 시추해내고 있으니 우리가 통념으로 생각하는 서예書藝로는 다 해명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 ‘결’에서 보듯 서書를 해체解體하여 최종적으로 남는 필획筆劃을 가지고 다시 그림을 ‘쓰면서’ 글씨와는 전혀 다 른 형상성을 창출해내고 있다. 일종의 문양의 범주라고 할 수 있지만 문양 코드로도 다 읽어 낼 수 없다. 서書와 그 이전의 그림 소 리 몸 언어의 복합체다.
그렇다면 김종원 작가가 여기서 일관되게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전작前作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추구해온 바와 같이 문자 문양이 태생부터 가지고 있는 영성靈性에 모아진다. 기존의 ‘곡신불사谷神不死’ ‘통령신명通靈神明’ ‘문문자자文紋字孶’ 등 의 일련의 작품에서 우리가 해독해 왔듯이 신화 시대 상형문자와 같이 영성靈性을 기계 시대 미감으로 써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문자文字이전의 언어인 문양紋樣의 세계, 즉 역사시대歷史時代 이전의 신화神話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 구의 드러냄과 다름 아니다. 동시에 기후변화와 코로나19같은 인류와 지구차원의 기계문명의 위기에 대한 경고 내지는 극복의 기도祈禱로도 읽힌다. 인간과 인류의 생사生死문제를 둘러싼 우주자연과의 대화란 우리가 아무리 문명개화를 했다고 하더라도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만년 후에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예술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김종원의 작품의 주제의식은 그야말로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다.
2… 이번 전시 ‘결’에서 선보이는 ‘올’ ‘결’ ‘겹’ 시리즈는 조형 언어 측면에서는 ‘쓰기’의 연장내지는 서書이전의 쓰기에서 뿌리 가 찾아진다. 김종원 작가 역시 “생각의 선線 긋기, 이를 서書라고 부르자. 서書는 문자文字이전의 문제다.”1 고 피력하고 있는 그대 로다. 다시 말하면 김종원의 ‘결’을 통해 우리에게 추상이 무엇인 지, 몸언어 소리언어 말언어 그림언어 문자언어가 어떻게 상호작 용하며 언예일치言藝一致의 세계로 도약하고 있는지를 새삼 생각 하게 한다.
몸짓—옹알이—그림—상형문자—전서—예서—해행서—초서를 거쳐 다시 태초의 일획으로 원조회귀元祖回歸된 존재가 김종원의 ‘올’ ‘결’ ‘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종원 ‘올’ ‘결’ ‘겹’ 에서는 말 이전의 소리 없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인간의 언어 는 몸언어와 말언어, 그리고 그림언어 이후 문자언어로 진화해 왔다. 몸 말 그림은 각각 신체 귀 눈으로 감각 하지만 문자는 눈과 귀, 즉 시청각視聽覺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해독된다.
이 중에서도 그림언어, 특히 추상抽象의 경우는 문자 이전의 소리 언어와 짝하면서 인간이 이 지구상에 던져지면서 언어하기 시작 한 때부터 지금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종원의 ‘올’ ‘결’ ‘겹’은 한국의 현실 조형언어를 먼저 돌아보고 자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획일화된 답이 정해져 있는 추상이 아니라 다양한 추상의 갈래가 드러남을 김종원의 ‘결’에서 본다.
3… 그간 한국미술에서 추상抽象이라 함은 우리의 내재적인 추 상 언어를 덮어놓고 서구 외래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이댄 다. 큐비즘에서 배태된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말레비치와 같은 계열의 추상이나 다다DADA, 로버트 마더웰과 잭슨폴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를 기준으로 한국 추상을 줄곧 생각해왔다. 즉, 추상抽象이란 기본적으로 대상이나 형체가 없는, 대상/형 체의 본질과 원형을 오직 색과 점點 선線 면面만으로 느낌을 표출 하거나 뜨거운 추상의 칸딘스키, 이것과는 정 반대의 인간의 감정을 완전하게 죽인 수직垂直 수평水平과 빨강 파랑 노랑의 극도로 절제된 색 만으로 대상의 본질本質을 그려내는 것 차가운 추상의 몬드리안을 사실상 전부로 간주해온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미술에서 추상을 서언어를 부정하는 서구잣대 로 잰 나머지 시청각의 합체인 서언어書言語와 같은 한국의 독자적 이고도 자생적인 추상 언어는 사실상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2
사실 추상抽象언어에 관한한 그 기원과 분포는 서구추상의 발명 이전에 이미 역사시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에서는 서書가 그 전 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시서화일체 詩書畵一體나 서화동원書畵同源, 사여불사似如不似가 말하듯 동아시아에서는 추상과 구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고, 무의미하기 까지 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100여 년 전 서양화 도입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서 그림은 구상과 추상으로 의례히 대별해왔다. 전자가 대상의 재현이고, 후자는 내면의 표출로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그림을 이해했다. 하지만 대상재현과 내면표출은 서구에서 조차도 본래 둘이 아니다. 김종원의 ‘결’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만 서구의 미메시스mimesis라는 척도로 보면 고대에서부터 자연물과 같은 대상 재현과 인간의 내면 표출은 근본 하나의 맥락으로 간주 되었다. 플라톤이 자연물은 이데아의 모조이고, 이 개념을 계승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인간의 본디 마음이라고 통찰 해낸 것이 그 증거이다.
더 근원적인 지점에 가서는 역사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류공통의 무수한 선사시대 추상 언어로서 문양은 물론 그 이전 에 까지 거슬러 간다. 더구나 현대과학이 밝혀내고 있듯이 모든 물질物質의 근원으로서 원자原字와 그 움직임의 실체가 파동波動 과 입자粒子라는 사실에서 보면 빅뱅Big Bang이 만들어낸 138억 년 전 태초의 우주 또한 거대한 추상덩어리 그 자체였다.
4… 이런 맥락에서 김종원의 일련의 ‘결’시리즈는 서구추상이 나 단색화와는 분명히 다른 결내지는 갈래를 보여주고 있다. 서書 문양文樣은 물론 물질과 우주의 기원문제까지 다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종원의 조형언어의 근원을 정병규는 ‘원획原 劃’으로 규정한다. 인습적인 서예書藝에 머무르지 않고, 더 본원 적으로 돌아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처음 우주자연과 대화해낸 시원의 필획筆劃을 가지고 유희遊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종원의 작업은 시공時空문제에 있어 경계가 없이 초월 적超越的인 데에서 제대로 해독된다. 그냥 이성과 감성 위주의 글 쓰기로서 서書가 아닌 것이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서書를 넘어선 서에서 김종원의 ‘결’은 제대로 읽힌다. 서書를 근본적으로 서書 의 원적原籍인 선사시대 문자文字이전의 천지가 태동할 때 문양의 문제까지 직관直觀해내는 것 자체가 초월적인 정신경계가 아니 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언어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김종 원의 ‘올’ ‘결 ’‘겹’ 언어는 몸언어, 소리언어, 그림언어와 같이 문자언어 창출 이전의 단계로의 회귀다. 그래서 김종원의 작품은 서화동체書畵同體 이전의 노래까지 불러낸다. 즉 텍스트와 이미지 가 미분화된 채, 글씨 너머 그림, 소리, 몸짓까지 작가 자신이 샤 만이 되어 우주를 혼융일체混融一體로 내통한다. 김종원식 김종 원류의 인간과 우주자연의 대화언어인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나눔도 동서의 구분도 필요치 않다. 김종원의 ‘결’시리즈 에서는 마치 138억 년 전 빅뱅Big Bang을 보 듯 작가는 태초 시공을 유영遊泳하고 있다. 조르주 르메트르Geor[1]ges Lemaître가 1933년 윌슨산 천문대 세미나 발표에서 말 한대로 “모든 것의 최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폭발이 있었고, 그 후에는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고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불덩어리와 같은 우주탄생 의 지점이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이나 동양과 서양과 같은 공간이 따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시공時空이 하나라는 것을 김종원의 ‘결’이 암시하고 있다.
5… 이러한 김종원의 ‘결’은 축지縮地 축시縮時로 우주를 마음대로 내왕하는 김종원의 초월적인 자의식, 즉 초자아의 결정체다. 이성과 감성내지는 감각 경험 인식의 세계를 넘어선 꿈의 영역에 서 붓이 무의식적으로 놀면서 탄생한다. 화면이라는 우주공간은 온통 필획이 겹겹이 굽이 친다. 하늘과 땅 조차도 없다. 건乾 곤坤 이 혼연일체가 되어 온통 필묵으로 요동치는 바다다. 암흑물질暗 黑物質과 같은 파동이 작가의 몸 기운에 올라타면서 이내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된다. 석도의 말대로 태고太古의 무법無法에서부터 폭발하는 태박일산太樸一散의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 서 모든 존재의 바탕이고 모든 현상의 근원을 노래하는 것이 김종 원의 ‘결’이다. 그래서 인간이 45억 살의 지구에서, 아니 그보다 도 더 이전 138억 살 우주에서 처음 언어言語한 때로 무한 깊이와 넓이로 소급된다.
김종원의 ‘결’시리즈는 태초의 소리와 노래이자 작가 자신의 신 神 기氣 골骨 육肉 혈血의 율동이자 호흡 맥박이다. 큰 고요함과 큼 움직임, 즉 대정大靜과 대동大動의 불이의 실제 경지를 ‘올’ ‘결’ ‘겹’에서 목도한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