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문학과 서화書畵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따라서 이 글은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김종원 작가의 작업에서 무수히 많은 문자들과 이미지들은 서로 혼재되어 있다. 각 글자의 필획은 축약되거나 과장되어 예기치 않은 형상을 만들 어 낸다. 글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구불거린다. 화면을 구성하는 빼곡하게 많은 글자들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숭고의 감각을 불 러일으킨다. 부적이나 그래피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글자들은 모여서 산맥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최근 작업에서는 글자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이미지가 된 경우들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형상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명상적 수행으로서의 선긋기이다. 그의 평면에서 선 의 의미는 기호로서의 문자와 교차하지만 그와 어긋난다. 평면적 드로잉과는 달리 서화의 선은 입체적이며, 그 입체적 공간을 만 드는 행위는 미리 고안된 의미 체계를 가로지른다. 작품 속 글자 들은 살아 있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각과 청각, 그 리고 다른 감각들은 서로 뒤섞인다. 작가는 이를 “주술적 주문”으로 표현한다. 시각적 표상 체계로서의 문자와 이미지는 작가의 수행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며, 이를 통해 “놓쳐버린 의미”를, 그 리고 “내면의 의식적 무의식적 감동”을 성찰한다. 한자가 지니 는 형상적 속성과 그 함축된 의미에서 출발한다.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작가에게 선긋기는 명상과도 같다. 문자의 세계에 접혀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차원들을 탐험한다. 그의 행위는 당대 문화에 대한 비평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동국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작업은 “문자의 주술성, 신성 성, 령성을 오늘날의 문자영상시대에 회복”하는 행 위이다. 선긋기는 점점 “키보드 치기”에 의해 대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보드는 기계를 대표하는 기술적 장치로, 그리고 문자의 주술적 주 문을 소환하기에 어려운 종류로 간주된다. 이 지점 에서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키보드 치기가 표상하는 기계-인간 얽힘의 상황 속에서 주술 적 주문을 수행하기는 진정 어려운 것일까? 이와 관 련하여 ‘주술’에 대한 생각을 짧게 논의하고자 한다. ‘주술’에 대응하는 한 가지 영단어는 ‘enchantment’ 이다. ‘chant’는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새들의 지저 귐 등, 운율과 리듬을 가진 구절과도 같다. 이는 근 대 문명 이전의, 또는 그 범주에 포섭되지 않은 일련 의 활동들의 결과 나타나는 청각적 현상을 의미한 다. 한편 주술의 반대 의미로서 탈주술 혹은 ‘각성disenchantment’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각성’은 신비적 이거나 신화적인 세계의 차원을 거세하고 이를 이 성적이고 합리적인 종류로 대체함을 의미한다. 모더니티modernity 비평의 맥락에서 볼 때, 현대 사회 modern society에서의 주술성은 거의 사라졌거나 희 미해졌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방점을 두는 현대 사 회 구조와 관료 체제는 더 이상 주술성을 주요한 의 제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술된 세계로부터 의 각성을 촉구한다. 물론 주술적 속성을 지니는 종교는 여전히 지속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술이 이성의 반대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술은 현대 사회와 공존한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한 가지 단서이다. 벤야민 은 위 작업에서 도시 공간에 분산된 다양한 주술적 순간들에 주목하였다. 다르게 말하면 물질문화 세 계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다양한 지저귐들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는 반복 구문, 후렴, 또는 흥얼거림 등을 뜻하는 ‘refrain’ 또는 ‘ritronello’와도 유사하다. 1851년 런던 수정궁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관찰할 수 있는 다양 한 사람들의 여가생활 풍경이 그 한 가지이다. 세계 의 다양한 사물들을 한 데 모은 박람회의 스펙터클 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술처럼 보인다. 이를 경험하 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수정궁이라는 초대형 조립식 건물의 안과 주변을 배회하고 사람들과 느슨하게 관계한다. 이성과 주술, 또는 이성과 낭만은 발전된 기술 환경 속에서 공존한다.
벤야민의 산보자flaneur 역시 주술의 측면에서 생각 해볼 수 있다. 산보자는 19세기와 20세기 초반 파리 의 아케이드 공간을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거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산보자는 상업주의의 바쁜 리듬과는 달리 걸음이 느리다. 마치 효율성이 라는 산업사회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것처럼, 그는 상인들과 거래를 하지 않을뿐더러 주변 사람들과 긴밀히 관계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방인 이자 관찰자이다. 역설적으로, 난잡한 아케이드 속 에서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산보자에게 아케 이드는 일종의 주술 공간이다. 주어진 체계를 가로 지르며 그 의미를 숙고한다. 월든의 소로우 역시 ‘saunter’라는 용어를 통해‘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 비슷한 듯 보이는 실천 형식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소로우는 벤야민과는 달리, 문명 세 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사색과 명상으로서의 걷기를 말한다.
한편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티브이 광고의 주술성을 말한다. 그의 2001년 책 『The Enchantment of Modern Life』에서 베넷은 의류회사 ‘갭GAP’의 1998년 광고 ‘카키 스 윙Khakis Swing’을 주술의 맥락에서 접근한다. 몇십 초의 짧은 길이를 지니는 이 광고에 는 해당 의류를 입은 사람들이 스윙 댄스를 추는 장면들을 담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흥겹고 역동적인 장면들 가운데 순간적으로 영상을 일시정지하고 카메라 앵글을 수평이동 시키는 부분이다. 이러한 장면 처리는 당시의 관점에서도 기술적으로 특별하 지 않지만, 저자는 이를 광고라는 상업 형식 속에서 펼쳐지는 리듬과 분위기로 읽는 다. 신체는 티브이 스크린 속에서 평면적으로 재구성되지만 온전히 그렇지는 않다. 춤과 노래는 미리 주어지는 설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는 결코 똑같이 두 번 반 복하지 않는다. 상품 이미지의 전달이라는 광고라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갭 광고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인 속성을 지니면서 또한 열린, 정동적affective 차원을 생성한다. 춤 추는 사람들의 신체의 움직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표상 체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처럼 사소할 수 있는 광고 분석을 통해 베넷은 ‘상품 물신commodity fetishism’ 이 아닌 ‘상품 주술commodity enchantment’을 주장한다. 광고의 화려함은 돈의 논리에 의 해 작동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에이전트를 통해 제작되고 매체를 통해 대중 과 공유 및 소통되는 방식은 온전히 이성적인 과정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즐거움이나 유머, 또는 어떤 분위기의 생성은 하나의 인상으로 남아 궁극적으로 상품 구매를 위한 과정일 수 있으나, 이를 선택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베넷의 분석은 이제 20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광고 이슈를 둘러싼 사태는 크게 달라 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 의해 이미지가 삶 속으로 보다 깊숙이 침투해 있다. 벤야민과 베넷 사례에 대한 논의는 문자, 이미지, 영상 그리고 각 종 기술적 장치들을 포함하는 기계와의 관계 맺기가 반드시 일방향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디어는 인간의 확 장이라고 말한 마샬 맥루한의 오래된 주장처럼, 어쩌면 2차 대전 이후 소비문화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근원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모호한 상태에 있는 듯하다. 나는 이러한 생각의 경로가 김종원 작가가 서화를 통해 수행하는 주술적 주문과 대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대의 조건들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명상과 수행은 불가피하게 주변에 흐트러져 있는 기계 장치들과의 조우를 통해 전개된다. 회복이 어떤 과거 시점 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현재 시점에서 작동 한다. 현재, 또는 당대contemporary는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동시다발적이며 파편적이다. 하나의 생각이나 의제로 수렴되기 어려우며, 또한 그 무수히 많은 작동의 실재를 온전히 붙잡기도 어렵다.
백승한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