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 독일의 극작가이자 사상가인 G.E.레싱은 「라오콘Lao[1]koon」1766을 통해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예술론을 펼치면서 ‘시간예술Zeitkunst’과 ‘공간예술Raumkunst’이라는 개념을 활용해서 예술을 분류하였다.
그는 예술의 표현 방식이 연속적이거나 계기적인 시詩는 ‘시간예술’로, 표현 방식이 정지적이거나 병렬적인 회화는 ‘공간예술’로 구분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뮤즈적 예술’과 ‘조형예술’ 이라고 하는 구분 방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분류 방식에 대해 반대하거나 오히려 하위분류를 더 세분화하여야 한다는 등의 여러 의견이 있으나, 어찌되었든 근대미학에서의 예술 분류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는 구분법이다. 그렇다면 서예書藝는 시간예술과 공간예술, 둘 중 어디에 속할까? 서예에 나타나는 언어복합체로서의 글자, 즉 글자가 ‘읽혀지는’ 텍스트에 주목한다면 시간예술로 분류될 것이고, 글자가 ‘보여 지는’ 조형에 주목한다면 공간예술로 분류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다천茶泉 김종원’의 작품세계를 통해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을 종합하는 새로운 차원, 구체적으로는 ‘읽혀지지 않고 보여짐으로써 오히려 더 깊게 읽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의 서書의 가능성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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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의출현arrival… 위 <그림1>은 무엇으로 보이는가? 아마도 붓글씨에서 획이 종이나 물에서 번지는 모습 같다는 의견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실체에 근접한 의견이기도 하다.
<그림1>은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이 연출하고 에이미 아 담스가 주연한 영화 「컨택트Arrival, 2016」1 에 나온 이미지로, 외계 생명체가 지구인들과 교신하기 위해 사용한 문자이다. 구체적으 로는 <그림2>와 같다.
문어 같이 생긴 외계생명체2 는 먹물과 유사한 물질을 내뿜어 글 을 쓰는데, 하나의 문자에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다. 즉, 시공간이라고 하는 4차원의 세계 속에서 인지적 제약을 받는 인간과 달리 영화 속 외계생명체 헵타포드는 ‘순차적 속성을 지닌 시간’과 ‘방향성을 지닌 공간’을 극복하여 새로운 차원의 사고를 한다는 설정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헵타포드의 글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 또 한 시공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사유체계를 얻게 되는데, 현재 시 점에서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미래까지도 인지할 수 있게 됨으로 써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는 내용을 영화는 담고 있다.
위의 헵타포드의 글자는 하나의 서사이자 하나의 그림이라는 이중적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내러티브이자, 시간의 구애됨 없이 정지된 형상만으 로 의미를 파악하는 조형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헵타포드의 글자에 예술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이 병존하는 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예술은 ‘외계’라고 하는 소설이나 영화적 상상으로만 발견되는 일이 아니다.
공시된서사… 당나라 장언원이 설파한 서화동체書畵同體나 원 나라 조맹부가 주창한 서화동원書畵同原 등의 말뜻을 살피면, 글씨와 그림이 본래 한 몸,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선언 이면에는 동아 시아 전통에서 글씨를 쓰는 도구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지필묵紙筆墨으로 동일하였 다는 실증적 사실 또한 내재해 있다. 또한 글씨란 글의 모양새를 뜻하므로 이러한 논지 에서는 서예를 미술과 마찬가지로 공간예술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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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절三絕의 덕목인 시서화詩書畵 중에서도 ‘서’가 가장 중핵적인 위치를 차지한 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간예술로만 서예의 성격을 한정할 수 없는 특수성이 나타난다. 즉, 서예는 ‘시’라고 하는 시간예술과 ‘회화’라고 하는 공간예술이 융합된 종합예술로 서의 성격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림3>참조
그러나 전통적인 서예가 ‘읽힘’으로써 시간성을 획득하는 방식이었다면, 김종원의 서 예는 ‘읽힘’을 벗어나 ‘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풍부한 시간성을 획득하고 있다. 자구 字句에 얽매이지 않고 조형이 됨으로써 서사의 폭과 깊이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림4>에서 보듯 글자의 형태는 완만히 사라지고 조형 그 자체로서의 미감과 획의 율 동이 드러난다. 이 순간 병풍에 세긴 글은 좌종서, 우종서, 좌횡서, 우횡서의 구분이 필요치 않다. 어떻게 ‘형’이 된 글자를 이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바로 서사적 고민이 된다. 그리고 그 이음의 과정이 내러티브로 작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는 글자를 통해서는 ‘하늘은 검고 아득하고, 땅은 누렇다.’는 핵심 의미가 미치는 자장 때문에 하 늘이 파랗다거나 땅이 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쇄되지만, 뜻 없 는 형태로서의 획stroke만이 남게 되면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으로 결합하 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형태와 의미가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기존 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계기적 의미를 만들어 낼 여지가 풍부해진 다. 이 경우 의미와 자의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는 ‘시각적’ 표현이 자 기호로서 음운적 표현과 기호의 대칭적 개념이 될 수 있다.
기존의 서사적 표현이 음운-음절-형태소-단어-구-문장-문맥[1]이야기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김종원의 작품세계에서는 ‘음’이 ‘형’의 형태로 치환되어 획의 발전이 서사가 발전되는 과정으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종원의 ‘서’는 ‘통시적 서사’가 아닌 ‘공시 적 서사’라는 역설적 명명을 얻게 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공시적 회화’가 아닌 ‘통시적 회화’라는 성격 또한 띠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문학과 미술과 서예가 종합된 진정한 ‘삼절’의 정 신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결結… 이상으로 김종원의 작품세계를 통해 서예가 시간예술 과 공간예술을 종합하는 새로운 차원의 내러티브로 전환되는 가능성을 탐색해 보았다. 최근 현대 서예의 흐름으로 꼽고 있는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 예’로의 나아감은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어쩌면 ‘서’의 근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경향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언어’의 하위개념으로서의 문자와 그 문자쓰기는 음성으로 표 현되는 언어의 전달 및 확장 수단이었는지 몰라도, 순수한 원시 미술에서 나타나는 ‘조형’은 음성언어나 문자언어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서예 의 조형성 강조는 그 동안 충분히 밝히지 못했던 웅혼한 세계의 한 축을 밝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최영
소설가
1 SF문학계의 거성이라 평가받는 테드 창Ted Chiang 1967~ 의 단편소설 「네 인 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가 원작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연출하고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컨택트Contact, 1997」와는 별개의 영화이다. 2 일곱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어 영화에서는 헵타포드Heptapod라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