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만물에는 각기 타고난 성정이 있기마련이다. 하늘은 늘 높고 푸르다. 이름 모를 나무나 풀 한포기에도 우주의 생명력을 담아 넘치는 개성이 있다.
오얏나무는 사람을 부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길이 저절로 만들어 진다. 높은 산봉우리, 기암절벽이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고 시문을 짓고 읊조리게 한다.
다천, 그는 이제 우리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또한 우리들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선사하고 있다. 그만큼 그에게서는 심산유곡 맑디맑은 야생의 향기가 스며 나오고, 일필휘지로 땅 위의 모든 만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가 보여진다.
나는 서예의 문외한으로서 어찌 함부로 그의 작품을 논할까마는,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바의 느낌의 일단을 피력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힘은 웬일일까.
흔히 서예라고 하면 우리는 모필로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천의 경우는 글을 쓴다기 보다는 글을 그린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높은 회화의 경지, 그것은 구름 위에서 한없이 멋을 있는 대로 구사하는 경지가 아닐까. 다천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근거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맑고 깨끗한 성정이 항상 혼불처럼 그의 작품에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혼자서 짓고, 쓰고, 그리는 그의 작품들은 바로 외롭고 높은 큰 존재의 문을 열어 보이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요즘처럼 곳곳이 어렵고 혼탁해져 가는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생명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각고의 정진을 거듭해 왔던 다천의 작품들, 맑은 매화꽃 한 송이를 가슴에 안은 듯 상쾌해진다. 정말 좋은 한 해의 징조가 아닌가 싶다.
이수오(창원대 총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