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Kim Jongwon
(약력)
1954년 태어났다. 제주대학을 다니며 소암 현중화 문하에서 서예공부를 시작해 고려대 교육대학원 문자학을 공부했다. 한국서예협회 결성에 관여, 경남지부 회장을 맡았으며 일본의 서도단체 “태현회(太玄會)”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창원성산아트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아트링크, 토포하우스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벨기에EU의회 한국문화의날기념, 영국런던한국문화원 G20런던정상회담기념으로 한글퍼포먼스에 초대되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2021 전남수묵비엔날레〉, 〈BVLGARI COLORS〉(2021,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ㄱ의 순간〉(2020,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Beyond Line〉(2019, LA카운티미술관) 등이 있다.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관장, 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 등을 지내며 창원에서 작업 중이다. 8월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토포하우스에서 개인전 〈결〉을 개최했다.
(리드)
대한민국은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 근대의 뒤안으로 사라진 것들에 대해 미처 애도하지 못했다. 산사태처럼 덮친 서양문물을 접할 때는 망쪼가 든 옛 것에게 다정하게 안녕을 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년 쯤 지나고 나니, 우리들이 서둘러 배웠던 모든 것들도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며, 우리의 유산이 무엇인가 더듬을 여유도 생겼다. 여기 그 애도를 묵묵하게 이어온 서예가, 아니 작가가 있다. 문자의 사라짐에 관한 그의 작업을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해설에 기대 들여다보기로 한다.
문자 이후-정병규
“서예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서예의 상황을 빼고 한국미술을 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한국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생각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서양에서 왔다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었지만 문자 자체로 구조주의 언어학을 깨는 “훈민정음”의 이미지성에 어느날 눈이 번쩍 뜨였다. 훈민정음에 대한 관심은 이후 타이포그래피와 맞닿는 서예, 그리고 현대미술까지 확장되었다. 그가 지켜봐온 서예는 이렇다.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서예는 그것을 뒷받침하던 한문(학)과 함께 죽었다. 한글 서예가 쓰여지긴 하지만 궁체는 한글 서예 모델이 될 수 없다. 궁체의 존재 이유는 서민과 민중을 위한 글씨라는 훈민정음 탄생 조건과 상충하거니와 판본체로서의 훈민정음에 대한 논의 없이 필사체인 궁체를 논의 하는 것도 순서에 맞지 않다. 여초 김응현이 주장했듯, 서예는 서화동원을 전제로, 서론이 있어야 성립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거꾸로 말해 서론이 없는 한글서예는 애초에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이렇다. “한글서예는 없다. 단, 아직은 없다.” 이는 한글 서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동양문명을 지탱한 한자가 사라지고 난 이후, 한글 미학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서예, 나아가서 한국의 (근대)미술을 새로 정립하는 길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서구가 재현의 사라짐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것처럼 우리나라 근대의 현상으로서 한자의 사라짐에 대해 지금이라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예 작업을 통해 이런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 김종원이다. 정병규가 보기에 죽은 서예를 애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書)’가 ‘화(畵)’와 분리되고, 이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도 ‘서예’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대학교육에 편입되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 어떤 담론도 생산하지 못한 서나 서예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서예가 죽었다는 소식도 듣지 못한 서예가들은 그동안 큰 붓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를 하거나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호한 획을 갈기고 묵에 색을 가하는 등의 실험을 하곤 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야심차게 서예 전시를 열며 서예를 미술의 한 장르로 조명했지만 이는 서예가 더 이상 동시대적인 가치를 생산할 수 없음을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최소한 정병규에게는 이 전시가 서예의 조종을 울리는 사건처럼 보였다. 서론 없는 서예는 그렇게 구천 떠돌 듯 떠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예를 배우기 위해 제주로 유학을 갔던 김종원도 마찬가지다.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표현주의에도 도전했으며, 색도 써본다. 정병규가 이런 김종원의 작업을 계속해서 유심히 지켜보는 이유는 그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서예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자를 자신만의 상형문자로 변환시키는 실험을 해온 그는 최근 획(劃)만 남긴 채 모든 의미를 다 걷어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여기부터는 서예의 문제가 회화의 문제로 넘어간다.
의미를 거두고 획과 물질만 남기는 건 회화 쪽에서 이미 실험했다. 정병규는 이우환 이강소 오수환도 서양미술의 기반 위에서 과거를 더듬어 획을 찾아냈지만 “단색화라는 한 바구니에 담겨 상품이 되었을 뿐” 잃어버린 근대를 애도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노장사상, 신비주의로 그림을 치장할 것이 아니라 서양미술사가 재현의 사라짐에 대해 끈질기게 추적한 만큼, 동양은 그동안 눈앞에서 사라진 한자와 서예에 대한 고민을 획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문자 이전-김종원
서예로 작업을 시작한 김종원은 문자라는 외피를 해체하고 문자가 형성되기 이전의 ‘행위’에 주목한다. 그는 “교조적 우상”인 문자, 즉 한자를 버렸다. 김종원은 시서화가 각자의 몸 없이 엉켜있던 혼돈을 그린다. 만일 시와 서와 화가 하나가 되는 그 지점이 사유 자체라면 그 사유를 획의 행위로 끌어낼 수 없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획 하나로 시서화가 하나가 되기 이전을 드러낸다.
서예가로 출발한 그는 여기로 오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마산고 재학 시절 우연히 마주친 소암 현중화(1907~1997) 전시를 보고 서예에 입문한 그는 묵과 한문학 바깥(그리고 제주 서귀포와 마산·창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단에서 그의 태도는 다른 서예가와는 조금 달랐다. 전통을, 스승을 그대로 받들어 모시는 서예를 한 적이 없다. 그랬더라면 왜색이 보인다고 비판받기도 했던 소암 문하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암의 글씨에서 어린 시절 국전 도록에서 보았던 소전 선재형(1903~1981)이나 원곡 김기승(1909~2000), 일중 김충현(1921~2006), 여초 김응현(1927~2007)의 것과 다른 어떤 참신함을 발견했다. 그 참신함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암의 글씨가 보편적 ‘미’를 다루고 있음을, 그것이 글자의 현상적인 미가 아님을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안에서 분투하며 글씨의 기능을 넘어서는 심미적인 상황(游於藝)을 향하게 된다. 목구멍과 귓구멍에 담았던 경전과 시들을 그대로 토해내 자신만의 문자로 써내려간 〈문문자자(文紋字茲+字)〉 시리즈를 그렸고, 종이에 붓만 대도 문자가 남는 자동기술법을 체득한 뒤에는 의미로서의 문자가 고착화되기 이전, 갑골문의 주술성을 담은 〈문자성령(文字聖靈)〉, 〈곡신불사(谷神不死)〉, 〈통영신명(通靈神明)〉, 〈풍신영가(風神詠歌)〉 등의 시리즈를 그려냈다. 먹을 먹인 종이에 주사로 그려낸, 글자 없는 〈용(龍)-통영신명 택풍산뢰(澤風山雷)/천지수화(天地水火)〉 등의 시리즈는 유교 이전 “풍류(風流)”를 현재로 불러오기도 한다. 여기까지 보면 문자는 버렸지만 아직 영과 정신은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의미의 빈 곳을 채우던 ‘이름’들을 마저 버리고 “결”만 남겼다. 화면에서도 작품 제목에서도 마찬가지다. 화면 가득 받아쓴 경전도 숨을 고르며 빈칸을 남기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서예의 근원인 갑골문 ‘더’ ‘이전’의 빈 몸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봐도 될 지….
미술사 바깥
정병규는 김종원의 실험을 “원획(元劃)”이라고 명명하며 그가 백 년 만에 서예 이후의 샘플 하나 내놓은 것으로 본다. 원획은 의미를 넘어서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에 가까워진다. 바로 여기에서 정병규와 김종원은 예술이 관념이 아닌 행위로서만 존재했던 시대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이동국은 한국 서예계의 실험이 여기까지 온 일이 없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정말 없었던 걸까. 이노우에 유이치(1916~1985)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위서예를 넘어서는 온갖 괴이한 실험들이 한반도 남쪽에서도 있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고 이론으로 재생산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늦게 출발해 아직 정신을 붙잡고 있던 김종원의 획은, 물질을 건너 장식을 떼놓고 다시 서사와 정신으로 돌아오는 서양미술(동시대미술)과 만나고 말았다. 이런 만남이 다시금 아포칼립스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문자 바깥을 발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온 김종원 같은 ‘작가’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배운 서양미술사에서는 추상이 재현 이후 등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동국이 보기에 동양에서는 구상 이전, 점획 그 자체가 추상이었다. 이제는 미술사 바깥으로 향할 차례다.
1) 김종원은 무속에서 유교로 넘어가며 한자가 정착하던 시기를 그는 ‘문명대전환기’로 명명한다.
2) 김종원은 개인전 〈결〉에서 재명명한 작품을 선보였다. 〈풍신영가〉는 〈올〉, 〈곡신불사〉는 〈결〉이 되었다. 주술적 형상이 드러나는 〈통영신명〉 시리즈는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3) 이동국은 김종원의 작품을 제3의 추상이라고 부르며 한국 추상 역사 새로 쓰기를 시도한다.
정병규
북디자이너